어느 멋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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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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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날 

 

어느 멋진날
 

늘 그렇듯이, 불행은 생각지도 못할때 찾아온다. 하지만 그 불행이라는 녀석이 더욱 무서운 이유는, 그 뒤에 행복이라는, 자신과 다소 상반된 녀석을 달고 올때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고, 기다릴 때는 고통이라 읽는다.

 

나는 그냥 뻔하디 뻔하고 흔하디 흔한 남자애였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어찌보면 내성적이고 어찌보면 외골수적 기질을 갖고 있는...그냥 평범한 놈이었을지 모른다.나 역시..불행이 생각지도 못할때 찾아온 케이스다.

“로스 엔젤레스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고객님들은...”

공항에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여성의 음성. 나도 그 음성에 맞춰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여 한발한발 내딛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생각해보면 길고도 답답하다. 누가 알았을까.내가 이렇게 10여년 만에 누나를 마중나가러, 게다가 혼자서 공항까지 올줄을.

-너네집은 돈많아서 좋겠다.-

종종 들었던 말이었다.아까 평범하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 궤변이냐고? 당연했다. 부모님이 돈이 있는거지 내가 있는게 아니니까.적어도 그땐 그렇게 믿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돈이라는게 얼마나 사람을 피말리게 하는지 알게 되었지만.

맞다.나는 엄청난 갑부집 아들은 아니지만, 나름 중산층이라 불리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두살많은 누나가 있었으며, 남들보다 곱절은 누리지 못해도 못누리는것 없이 자랐다.

어찌보면 꽤나 행복한 가정이었다. 누나는 중학교때 유학을 떠나기 까지한,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앞서가는 유학생이기도 했다. 끝내 바이올린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종종 통화도 했지만, 누나는 미국유학시절중 처음으로 지금 한국에 오는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더이상 공부를 할수 없으니까.우리 뒤에서 영원히 있을것만 같았던 부모님들은 사고로 지금 여기 계시지 않으니까.

어느날 집에 생전처음보는 ‘빚쟁이’라는 존재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진, 나는 그냥 쭈욱 이렇게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지,그때는 그게 행복한 줄도 몰랐을수도.

일은 연쇄적으로 터졌다.마치 약품과 약품이 만나 반응하는 화학반응처럼, 원래 그렇게 짜여졌던 인과관계 였다는 듯이 동시다발,연쇄적으로 터졌다. 사업이 갑자기 무너진 아버지는 책임을 느끼고 자살했고,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가던 어머니는 2톤 트럭과 정면 충돌해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하...드라마에서나 나오던 이야기였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다...상상해본적도 없고 굳이 상상하는것도 범죄였다. 그런데 난 이렇게 된 것이다. 이제 대학교 2학년. 군대 말고는 고민따윈 없던 내게 세상이 내 꿈을 펼칠 장이 아닌, 무서운 야생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왜 안나오는거야...”

난 시계를 보며 괜시리 투덜거렸다.비행기를 타본적이 없으니...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리가 만무했다. 미국에서 오는 비행기 내내 누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하.10년만에 만나는 오누이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현실이 우습다.

누나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실어증이 걸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그리고 그 소름끼치는 침묵이 끝나고 나서 그녀는 몇십분이고 전화기를 잡고 오열에 오열을 반복했었다.

촤르르르...

게이트가 열리고 공항의 카트들이 일사 분란하게 나오기 시작했다.기다리던 이들은 저마다 고개를 쭈욱 빼고는 자신이 찾는 이가 나오는지 확인하기 바빴다.하하.내가 알아볼수나 있을까? 10년이다. 처음 몇년은 미국이 뭐가 그리 좋은지 오려고 하지 않았고 그 이후 몇년은 집안 사정이 안좋아져 한국에 오지 못했지.

저마다 자신의 친인척을 만난 이들은 기쁜 마음에 서로를 얼싸안는다.나는 바리케이트에 양팔을 기댄채로 젊은 여자가 나올때마다 유심히 살펴야만 했다.내가 기억하는건 중학교 2학년때의 누나의 모습뿐이고,누나가 기억하는 내 모습은 초등학교 6학년때의 내 모습일 테니까 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서로를 모르는 웃긴 상황인거다.

‘어....어?’

누군가가 나왔다. 빨간체크무늬가 들어간,제법 비싸보이는 코트밑으로 검정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미세하지만 무언가가 머릿속에 스쳐가는 기분이다.

“너..예영이 맞지?그치?”

분명 어렸을땐 작았던 눈인데, 쌍커플이 선명한 동그랗고 섹시한 눈망울이 되었다.높지는 않지만 뾰족한 코에, 아직은 쌀쌀한 늦겨울 날씨 탓에 립클루즈를 발라 반짝 거리는 빠알간 입술을 하고서...긴 머리를 살짝 묶고 대신 앞머리를 조금 옆으로 내려 이마를 조금 가린 한 성숙한 여인이 나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른다.

 

어느 멋진날
 

“하..하하.”

나는 실없이 웃어버렸다. 10년이란 세월이 강산만 변하게 하는게 아니라, 여자의 얼굴을 변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분명 예전의 얼굴은 희미하게 있어서 찾았겠지만, 이건 뭐랄까...

“너무 이뻐졌잖아.”

“너 왜이렇게 키가 많이 큰거야?우와..”

그녀, 예림은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한참이나 바라보며 어색한지 쿡쿡 거리며 웃었다.초등학교때 누나~누나~하며 졸졸 따라다녔을때의 예림이 누나는 나와 비슷한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성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165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코트안이라 알수는 없지만 꽤나 늘씬해 보이는 체형. 적어도 내 시야에 노출되어 있는 다리는 너무 곱고 이쁘다.

“많이 기다렸니?”

“조금...푸하하!근데 정말 신기하다.”

웃음이 터진건 나뿐만이 아니었다.약간은 상기되어 있을줄 알았던 예림 누나도 나를 보며 덩달아 따라 웃는다.그런 실없는 광경이 또있을까. 친남매가 공항에서 10년만에 만나 서로를 보며 배를 잡고 웃는 모습말이다.

“미안해 예영아. 너혼자...”

누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엄마와 아빠의 장례를 혼자치른 나에게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게을러서 오지 못한게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5개월 전부터 누나에게 매달 송금했던 돈은 뚝 끊겼고, 그녀역시 부랴부랴 아르바이트 한돈을 끌어모아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산것이니까. 그것도...지금까지의 모든 공부를 포기하면서 말이다.

그런 누나에게 생색을 내는 것은 철없는 내가 보기에도 몹쓸짓이었다. 그나마, 그나마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충격과 슬픔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인 지금 오누이 상봉을 하는 것이 행운일지도 모른다.10년만에 만나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건 사절이었다.

“이리줘.”

나는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그녀의 케리어를 빼앗듯이 낚아 쥐고는 앞장섰다.그녀는 보폭이 빠른 내걸음을 맞추려고 종종 걸음으로 내 옆을 따랐다.

“와..너 키 몇이야?진짜 많이 컸다.”

“176인데?”

“엥?생각보단 안큰데?”

으흐흐. 그녀가 남자의 자존심인 키높이 깔창에 대해 알란가 모르겄다. 왜 친누나를 만나는데 키높이 깔창을 깔았냐!라고 묻는다면 다소 억울하다. 그 깔창은 누굴 만난다 하더라도 내 운동화 안에 자리잡은 내 마지막 존심이니까.

“너무 변했다..진짜..우와..”

예림이 누나는 공항을 둘러보며 연신 신기해 했다. 하하.그럴법도 하다. 나갈때는 김포공항으로 나갔고 올때는 인천공항으로 들어왔으니 얼마나 격세지감을 느끼겠는가.그래도 10년이나 미국에서 살다 왔는데 꼬부랑말 하나 안쓰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가 왠지 이뻐보인다.

“피곤했겠다.비행기 오래타서.”

“괜찮아. 쭉 앉아서 오는데 뭘.”

“비행기는 입석없어?”

“...진심이야?”

“농담이야. 나 이래뵈도 대학생이야.설마 그런거 모를까봐.”

“들어갈때 신발벗고 들어가는 에티켓도 알겠네?”

“으..응?진짜 그래야해?”

“뻥이야 바보야.쿡쿡.”

“.....”

장난기 있는 성격도 어디 가지 않았네. 그래도 가족이라는 게 이런 힘이 있구나.10년만에 만났는데도 그렇게 많이 뻘쭘하지가 않다. 그래. 뻘쭘하면 안된다. 이미 고인이 된 부모님들 생각해서도 안되고. 또 옛 기억을 끄집어 내어 괜시리 센치해지고 슬퍼져서도 안된다. 이제 세상은 누나와 나 둘이다.

“어디로..가야해?”

수없이 들어선 공항리무진들을 보며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뭔가 생각이 떠오르지 않거나 할때 나오는 입술깨무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다른게 있다면...입술이 너무 이뻐진 거겠지만. 하하.

“나만 따라와.”

나는 능숙하게 그녀의 앞에 앞장서서 걸었고, 누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를 놓칠까봐 불안해서 인지 내 점퍼 자락을 꼭 쥐며 나를 따랐다. 하하.이럴때 보면 나보다 누나라기 보다는 동생같다.이것도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구나.

옛생각이 떠올랐다. 동네에서 제일 가는 장난꾸러기였던 만수가 매번 우리누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을때, 누나는 늘 울면서 나에게 찾아와 이르곤 했다.그때마다 나는 누나를 데리고 만수를 찾아가서 신이나게 패주었고,그때 집에 돌아올때도 누나는 내 옷자락을 이렇게 꼭 움켜쥐고 있었지. 지금쯤 만수는 뭐할까? 아동심리학상 당시에 만수는 예림이 누나를 좋아했을 텐데 말이다.

“아...”

누나는 예전 집 방향이 아닌 다른 행선지에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래..뭐..지금 집을 보고도 그렇게 놀라지마.예전처럼 2층집도 아니고, 또 예전처럼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지도 않으니까.

그녀와 나는 말없이 짐을 싣고는 리무진버스에 올라탔다.평일이라서 일까 아니면 그다지 인기 없는 지역이라서 일까.버스에 승객은 많지 않았고, 우리는 맨뒤에서 첫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우와.되게 편하다.넓구.”

“선진국에서 10년 있으신 분이 뭘 이런거에 놀라시나.”

“하하.선진국이래봐야 별거 없어. 자동차가 붕붕 떠다니고 그런것도 없고.”

“헛!정말이야? 미국엔 아직도 비행자동차가 없어?”

“안속아 그만해.”

“풋.”

그녀는 괜시리 싱긋 웃어주고는 시트에 기대었다. 비행기를 안타본 나도 잘알고 있었다. 누나가 있던 뉴욕에서 한국까지는 무려 14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니까. 그것도 이코노미 클래스의 좁은 시트에서 그녀는 꾹꾹 참고 온것이다. 희망적이고 기쁜 여정도 아니었을테니...어쩌면 백만원을 호가하는 비행기보다, 만원이 약간 넘는 이 공항 리무진 우등버스 자리가 훨씬 더 편할것이다.

그녀가 살짝 시트에 몸을 묻더니, 이내 점차적으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멋진날
 

‘많이 피곤했나 보네.’

화장기 없는 누나의 얼굴. 가까이서 봐도 피부가 너무 깨끗했다. 곱게 감겨져 있는 눈위로 긴 속눈썹이 살포시 덮여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그녀의 얼굴에 눈물자욱이 말라붙어 있는것만 같다.

나는 천천히 어깨를 누나쪽으로 밀어주었고, 그녀는 잠결에 스르르 내 어깨에 고개를 대었다. 긴장감이 풀려서겠지. 그리고 원래 누나는 잠이 많았으니까.

누나가 깨지 않을 만큼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앙증맞은 입술이 반짝반짝 거리고, 가까이 붙어 있으니 누나의 향기가 코를 찌를듯 숨이 막혔다. 왜였는지는 지금도 알수 없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누나의 볼을 만져주었다.

“음...”

그녀는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듯, 잠결에도 가볍게 앙탈을 부린다. 가만.......내가 왜이러지? 왜 누나의 자는 얼굴을 이렇게 빤히 보는걸까?그것도 친 누나의 얼굴을.

‘미쳤나...’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던 내 자신에 대한 실소와 질책이 한번에 들어왔다. 내게 완전히 기대어 버려 그녀의 하얀손이 내 허벅지위에 자연스레 올라와 있었다.그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위치였다.

‘다리도 예쁘네.’

스타킹을 신고 있지만, 누나의 다리는 참 이뻤다. 다리가 이쁘다..라는 것을 인지할리가 없는 초등학교 6학년때 보고 지금 봤으니, 새삼스레 그런 심정이 들수도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봤으니까..’

나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려다 내 자신에게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미친놈. 어디다 대고 합리화란 말이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픔을 모두 억누를 만큼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누나에게 이런맘을 먹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나 자신에게 한없이 꾸짖음을 주며 나무랐다. 그래.안될말이지. 물론 누나가 너무 많이 이뻐진것이 정당방위로 작용할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안되는거다.

마음속에서 외치는 이야기들과는 달리, 나는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다른이들의 눈에 비친 누나와 나는 어떨까. 닮지 않았으니 남매로 보진 않겠지? 어쩌면 신혼여행에서 막 온 젊은 부부라고 볼지도 모르겠다.

10년이란 세월은 가족이란 터울마져 넘길만큼 강력한 모양이었다.나는 자고 있는 누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날렵하기 까지한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내 시선도 차츰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갔다.쎄근쎄근 잠드는 통에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녀의 상체. 그리고 유독 빛나 보이는 입술.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손이 차가와 진다.

‘아씨.진짜 내가 왜이러는 거지’

마인드 컨트롤이 안되니 투덜거림이 자연스레 튀어나온다. 몸이 빳빳하게 굳었고,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래.내 다리위에 올라와있는 손을 잡자. 오누이끼리 손잡을수 있는거 아니야? 고생이 많았을테니까 격려의 의미로.

나도 모르게 해서는 안될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손을 살짝 뻗어 누나의 손끝을 툭 하고 건드려 보았다.여전히 미동도 없이 고른 숨소리를 들려주는 그녀.용기를 내어 살짝 그녀의 손등위에 내 손을 포개어 보았다.

그녀가 살짝 뒤척였지만, 이내 곧 잠잠해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따뜻했다.그리고 부드러웠다. 여자의 손을 안잡아본 쑥맥도 아닌주제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했던 그녀는 어느덧 여인의 향기가 물씬 나는 성숙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은 내 손에 힘을 주었다.쓰다듬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아니, 어찌보면 그냥 잡고 있기만 하는 것이 내 죄책감이 허락한 커트라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놓을수도 없었다.그러기에는 누나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이 내겐 너무 큰 유혹이었다.

그랬다.그때 당시엔 정말 몰랐었다.내가...아니, 나와 예림이가 보통의 오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해?”

커다란 케리어는 내가 맡고 있었지만,그녀도 꽤나 큰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힘든것은 당연할 것이다.솔직히 그것보단 많이 불안하다는 표현이 옳을지 몰랐다. 예전처럼 괜찮은 집도 아니었고, 번화한 동네는 더더욱 아니었다. 리무진을 타고 내려서 또 시내버스를 타고 달려서야 비로소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리 성인이지만 그녀도 여자다. 불안했겠지...쩝.

“이제 다왔어.”

“그 말은 10분전부터 했잖아.”

“이제 정말 다왔어.”

“여기서 보여?”

큰 눈을 껌벅껌벅 거리며 불안해 하는 그녀가 귀엽다.아니, 솔직히 좀 불안하다.우리집을 보여주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것만 같아서였다.

“응.저기.”

내가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자, 그녀가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쭉 빼며 전방을 응시했다.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 끝에는 작은 원룸형 빌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저기구나.”

애써 괜찮은척 하려는게 눈에 훤히 보였다.그녀가 실망한것은 고급스런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부모님을 잃어서 우리둘이 덩그라니 놓여진 현실의 벽을 집을 봄으로써 실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괜찮은데 뭘.”

집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괜시리 베시시 웃어주었다.추운 날씨에 골목을 누빈탓에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방안은 여전히 입김이 나왔다.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내가 보일러를 끄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리차를 데우는 동안, 그녀는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방하나에 덩그러니 있는 침대와 옷장,그리고 책상. 방 겸 부엌을 지나면 화장실을 겸한 조그마한 욕실이 있었다.혼자 살기엔 너무 넉넉하고, 둘이살자니 불편할 만한 크기였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앉았다.

“이제 여기가 우리가 같이 살 집이구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느껴져, 나는 얼른 보리차를 내밀었다.그녀는 꽁꽁 언 손을 녹이려는듯 물을 마시는 대신 내가 건낸 찻잔을 움켜쥐기만 했다.

“생각보다 좁지?”

“빚은..어떻게 됐어?”

“다 처분됐어.집팔고,땅팔고,있는거 싹싹 모아서.”

“그랬구나. 이 집이라도 있는게 다행이다.”

“보험금이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게 얼만데?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보험금...부모님이 비싼 보험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꽤 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빚을 정산한다는 명목하에 일정액이 감산되었고, 그것은 이 집을 빌리고 나서도 내 통장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적은 돈은 아냐.하지만 그냥 막쓸정도도 아니고.”

예림이 누나는 내 말에 보리차를 홀짝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불안불안 하더라니 드디어 내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가 위아래로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멋진날
 

“흑...”

나는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우는게 싫지만 울지말라고 소리지를 수도 없었다.곱게 자란 예림이 누나는 결코 강한여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곁에 없는 것을 납득하게 될만큼 시간이 지났다 한들 슬픔까지 깨끗이 씻을수는 없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찻잔 마저도 내려놓고는 손틈으로 얼굴을 묻었다.

“울지마.”

“흑...흑...”

“울지말라니까. 내가 대학 포기하고 그냥 일할게.우리 둘이 어떻게든 될꺼야.누나 다시 미국보내줄게.”

“싫어..누가 그렇게 하고 싶댔어?흑..”

그녀는 울먹이는 소리로 훌쩍대었다.고운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내 손틈사이로 눈물에 베어나온다.잠시 우물쭈물대던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예영아..으아아앙!”

어깨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내가 앉자마자 그녀는 내게 안겨 억누르던 눈물을 한방에 터뜨려 버린다.

“우리..흑..이제 어떡해?우리둘이..흑..흑..”

그것은 나역시 수천번도 더 생각해본 문제였다.결코 지금 상황에서는 답이 나올수가 없는 명제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 이상황에서 내가 그녀에게 답이 없다고 할순 없었다. 부모님이라는 울타리는 사라졌다. 세상은 나와 누나 둘뿐이 되었으며 내가 그녀에게 있어 울타리 역할을 해야하는것이다.

“내가 있잖아.둘이..둘이..잘해보자.응?”

잠시 망설이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았다.잠깐 움찔하는것이 누나도 내가 그럴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누나는 그것을 남동생으로서의 포옹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이내 내 목에 팔을 걸며 나를 안아주었다.

따뜻했다.

울고 있는 누나의 흐느낌은 가슴이 아팠지만,그 순간 내가 느낀것은 따뜻함 이었다.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볼과 내 볼이 닿았을때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제 내가 누나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나 없이 이 나약한 여자가 할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넘쳐오르는 사명감에 그녀를 꾹 끌어 안았다.

“예영아..”

“응..”

“넌 계속 대학다녀.”

“등록금이 얼만데.”

“누난 그래도 대학과정을 간신히 마쳤지만,너는 꼭 그래야해.넌 남자잖아.”

그녀의 마음이 이쁘기보단 귀여웠다.어쩌면 그녀 말대로 지금사정에 누나가 미국에 가서 전공을 살려 음악을 하는 것 보다 내가 대학공부를 잘 마쳐서 성공하는 것이 수지에 맞는 일일지 모른다.

“그럼 누나는?누나는 어떡할건데.”

“일 찾아보면 되잖아.아르바이트건 뭐건 할거야.그리고 영어를 하니까 운좋으면 좋은 회사에 갈수도 있잖아.”

그 말은 희망적이라기보다,오히려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흉기와도 같은 말이었다.누나는 결코 회사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회사원이 천박하다는게 아니다. 누나는 음악을 했던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래야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장래가 이렇게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우리 같이 노력하자.첫날부터 이러지 말자고.”

“...알았어.”

한참동안 달래고 나서야,그녀는 퉁퉁부은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내었다.훌쩍거리는 누나의 모습이 웃겨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토끼눈 처럼 빨갛게 부은 그녀가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어서 가서 씻어.피곤할텐데.”

“근데 잠은 어디서 자?”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침대는 하나잖아.”

둘이 같이 자면 되잖아 꼭 껴안고..라는 농담은 그 상황에서 절대 할수 없었다.하지만 왜일까?당시에 나는 그 말이 진심으로 하고 싶었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싫어.니가 침대에서 자.”

“맘에 없는 소리한다 또. 침대 아니면 허리아파서 못자잖아.”

“그치만 너..불편하잖아.”

“흐흐.글쎄.자다가 불편함을 핑계로 침대위로 슬슬 올라갈수도..아야!”

내 농담에 누나는 내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고는,살짝 몸을 일으킨다.

“배는 안고파?누나가 뭐 해줄까?”

“됐어.오늘은 그냥 일찍 자자.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한데..아까 리무진에서 코까지 골더라.”

“저..정말 내가 코골았어?”

푸하하.놀리기 성공이다.아직도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서 그녀는 볼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해 한다. 동생인 내앞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누나 역시 10년의 갭은 무시하지 못하는 걸까?

“응.아주 드르렁 드르렁 난리 나던데.”

나는 일부로 코를 고는 소리를 내며 누나를 놀렸고,누나는 더욱더 안절부절 못해했다.더이상 놀리면 안될거 같아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이라 말해주었다.

“너 그런장난 치면 혼나!”

“알았어 씻기나 하셔.”

“칫솔은 있어?”

“다 사다놨어.욕실에 새거 있으니까 그냥 그거 쓰면 돼.”

누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트를 벗었다.슬슬 보일러로 방이 뜨끈해 지기 시작했고,나는 그녀를 위해 목욕모드로 돌려주었다.

코트속 누나의 복장은 의외로 두껍지 않았다.치마위에 가디건 한 장이 전부였다.벽에 창호지를 바른것처럼 누나몸에 붙어 있는 가디건. 성인으로써의 누나는 오늘이 첫대면이어서 일까?뭔가 새롭다. 적당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 그에 대비해서 나름 여자다운 라인이 살아 있는 그녀의 허리와 힙까지.

“저기...”

그녀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계속 망설였지만,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갈아입을 옷은 가방에서 챙겨 꺼냈지만, 욕실까지는 옷을 벗고 가야할테니까.

나는 군말없이 뒤를 돌아주었다. 보고싶은 마음은...솔직히 많았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작은 커튼 칸막이라도 하나 사야겠어.”

멋적은지 그녀가 말했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오누이지만 남녀가 한방에 살다보면 옷을 갈아입을때 불편할테니까. 나는 내일 사다놓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스윽.

치마가 내려가는 소리, 가디건을 벗는 소리.그리고 스타킹 고무줄이 탁 하고 튕기는 소리까지 내 귀에는 너무 생생하게 들렸다. 내 의지나 도덕적인 잣대와는 상관없이 마른침이 목젖을 넘어갔다. 왜일까? 왜 이럴땐 내 머릿속 상상력이 200퍼센트 이상 발휘되는 이유는.

“이제 됐어.”

그냥 욕실로 들어가면 문소리로 대충 알 것을, 그녀는 친절하게 됐다고 이야기까지 해주고는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나는 그녀의 트렁크를 한쪽으로 정리해 놓고는,침대위로 벌렁하고 드러누웠다.

‘잘할수 있을까?아니..잘해나가야해.’

그래.적어도 혼자보단 나았다.착하고 똑똑한 누나와 같이 있다면, 서로 의지는 될테니까.곧 개강을 하지만 남들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살면 될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마져 내 가슴속을 뿌듯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래.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어느날 불현듯 이뤄진 10년만의 만남.그리고 갑작스레 이어진 누나와의 동거.

그렇게...성인의 첫자락에서 다시만난 누나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멋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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