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상처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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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상처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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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상처 하편 

 

 

그날 이후로 우린 거의 석달을 소 닭 보듯 외면한 채 지냈다. 나는 나대로 상처가 너무 컸고, 미나네들은 걔들대로 나 보기가 민망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또래의 인간 관계가 대개 그렇듯 우리는 어느 틈엔가 다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로 다가들어 있었다. 가슴 깊이 가라앉아 있는 앙금은 가끔 서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변죽이 좋은 성란이들었는지라 나도 모르는 새에 예전처럼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말은 서로 터놓고 나누는 듯해도 나는 항상 일정 거리의 경계막을 쳐 두고 있었다. 이븟날 밤에 겪었던 일이, 미나들에게는 별 대수로운 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지우기 힘든 상흔으로 남아 가끔씩 소리없는 아우성을 쳐댔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가는 건 좋긴 한데 또 지난번 같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더구나 도와줄 사람조차 없는 낯선 곳에서. 아무리 성숙이의 사촌이고 같은 학년의 동급생이라지만 남자들은 결국 다 똑같을 텐데···. 이븟날 그렇게도 순순히 남자에게, 그것도 언니의 클라스메이트인 사람에게 몸을 던지는 미나라면 그곳에서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을 텐데. 성숙이야 제 사촌이 있으니까 어떨지 몰라도 희영이 역시 그런 점에서는 미나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테고···.

나도 며칠 바닷가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븟날 한 방안에서 스스럼없이 남자들과 안고 딩굴던 미나들의 충격적인 모습이 떠올라 쉽게 마음이 내키질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학원에 등록해서 뒤진 과목 보충이나 하는 게 후회없지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쪽지가 또 왔다.

바닷가의 상처 하편
 

<귀하의 우려하는 바를 일체 없애기 위해서 00들은 텐트, 우리들은 근처의 민박집 방을 따로 얻기로 했음. 또한 귀하에게는 설거지를 포함한 모든 잡무를 전혀 맡기지 않겠으며 일정의 100%를 귀하의 의견대로 무무무조건 따르겠음. 그래도 귀하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 3인은 포기함과 동시에 오늘 방과후 학교앞 분식집 ‘짱구네’에서 순대를 각 20인분 씩 먹고 배터져 죽어 버리겠음. 꼭 참관하셔서 우리의 장렬한 전사를 지켜 보시길 바람.>

깨알같은 글씨로 길게 써 내려간 쪽지의 아래에는 미나와 성숙이, 그리고 희영이의 사인까지 그려져 있었다.

저희끼리 부지런히 쪽지를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떡합니다? 가기도 그렇고 박정하게 딱 잘라 버리기도 난처하고··· 이렇게까지 나를 끼워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방과후에 짱구네 분식집에서 함께 만나 긴 얘기 끝에 나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닷가 행을 승락하고 말았다. 내 젊은 날의 한 조각을 어두운 늪속에 떨어뜨려 버리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야! 바다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풍경이 가슴을 확 터주는 듯했습니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원한 해풍에 실려 온 비릿한 갯내음은 오히려 상큼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탈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어때, 역시 같이 오길 잘했지?”

성란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래, 고마워.”

나는 진심으로 나를 같이 끼워 주려고 안간힘을 쓴 친구들이 고마웠다.

“자, 자, 바다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니까 이따가 차분히 감상하기로 하고 우선은 좋은 자리에 집부터 지어야지.”

벌써부터 모래밭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수선을 떨어 대는 우리를 보고 진용이가 흐뭇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먼저 여자애들 민박집부터 정해 놓고 거기 가까운 데에다 텐트를 치는 게 어때?”

재철이가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버스 안에서 우리는 서로 상당히 친근해져 있었다. 남자 쪽의 진용이와 성숙이가 사촌간이라 그 친구들에게도 은연중에 신뢰감이 들었고 같은 학년이라는 동류의식도 촉매 역할을 해 서울에서 출발하면서 이미 우리는 서로 말을 놓기로 했습니다.

재철이는 키도 크고 얼굴도 제법 핸섬해 귀공자 스타일이었는데 말하는 것도 시원스럽고 리더십이 있어 남자애들 쪽의 리더 격이었다. 버스 안에서 소지품을 나누어 골라 파트너를 정했는데 성숙이가 약간의 의도적인 조작(?)을 통해 내 파트너로 정해 주었다. 저런 아이라면 친구로 한번 사귀어 봄직도 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터라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게 신경을 써 주는 성숙이 내심 고마웠다.

“자, 수미야. 네 짐 일루 줘.”

재철이 내 배낭을 성큼 뺏어들더니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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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질투나서 못 봐 주겠는데. 얘, 니나야, 너도 배낭 이리 줘. 나라고 기사 노릇 못 하란 법 있냐.”

미나의 파트너인 영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희영이 역시 파트너인 진용이에게 배낭을 맡겼고 성숙이도 별명이 ‘깡통’인 강돈이한테 배낭을 내맡겼다.

양 어깨에 두 개의 배낭을 짊어진 재철이들을 앞세우고 우리는 웃고 떠들고 깔깔거리면서 민박집을 구하러 다녔다.

서너 집을 들른 후에 우리는 꽤 마음에 드는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고 여자들만의 샤워장까지 별도로 설치된 것도 마음에 들었으나 무엇보다도 방이 넓고 깨끗해 좋았다.

남자애들이 텐트를 치러 간 틈에 우리는 대강 짐을 풀어 놓고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시원한 바닷물에 풍덩 뛰어 들고픈 마음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 미나 야한데!”

성숙이 미나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리며 깔깔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잖아도 우리들 중에서 가장 성숙해 어른스러운 티가 나는 미나는 그야말로 가릴 곳만 겨우 가린 비키니 차림이어서 여자인 내가 봐도 아슬아슬할 지경이었다.

“언니 걸 살짝 쌔비했지 뭐. 어때, 괜찮니?”

마치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미나가 살짝 몸을 뒤틀어 야한 포즈를 취하며 윙크를 했습니다.

“야야, 오늘 잠 못 잘 남자들 꽤나 많겠다.”

“후우, 브룩 쉴즈가 울고 가겠는 걸. 어쩌지? 우린 영 틀렸는데. 너하고 너무 비교 되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미나는 정말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크고 동그란 젖가슴 하며 탱탱하게 치올라 붙은 히프, 길고 늘씬한 허리와 다리 곡선이 우유처럼 보얀 살결에 어우러져 눈이 부실 정도였다. 누가 봐도 이제 여고 2학년의 어린 소녀라고는 믿지 못할 것이었다.

성숙이는 약간 통통하게 살이 오른 편이었다. 그래선지 큰 편인 젖가슴이 더욱 도드라지게 커 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잡힌 편이어서 말하자면 글래머 같은 인상을 풍겼다. 또 희영이 역시 미나만큼은 아니지만 큰 키에 어울리는 날씬한 몸매가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가 오히려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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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몸을 곁눈질하면서 나는 은근히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나는 미나처럼 예쁜 얼굴에 잘 빠진 몸매도 아니었고 희영이처럼 키가 크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숙이처럼 전체적인 균형이나마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원피스 수영복의 어깨 끈만 하릴없이 매만지면서 미나나 희영이를 향한 부러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쩜, 수미야. 너 보기하곤 다른데?”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희영이가 갑자기 나를 들먹였다. 그러더니 와락 손을 뻗쳐 내 가슴을 모두쥐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머나!”

내가 질겁을 하자 모두들 큰소리로 깔깔거렸다.

“얘는··· 무슨 짓이야.”

나는 희영이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희영이가 더욱 크게 깔깔거리며 이번에는 날 껴안는 시늉을 했습니다.

“내가 남자라면 난 수미 너를 택할 거야.”

“맞아, 수미 너한테는 알 수 없는 청순함이 있다니깐.”

“얘들은, 누굴 약 올리는 거니?”

“아냐, 정말이라니깐. 넌 정말, 뭐랄까··· 깨끗해 보인다고나 할까, 순수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냥 표현하기 힘든 뭐 그런 게 있어. 게다가 이 뽀얀 살결 하며 콱 깨물어 보고 싶은 이 앙증맞은 젖통···”

희영이 다시 내 가슴을 만지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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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젖통’이라고 말할 때의 희영이의 억양이며 표정이 몹시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영복을 갖춰 입고 썬탠 크림까지 바른 후에 우리는 뒤질세라 달려 나가 바닷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텐트를 다 설치하고 온 남자 애들과 어우러져 물놀이며 수구, 비치볼 게임 등으로 모처럼 신나고 활기찬 시간을 보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짙푸른 바다, 그리고 달구어진 모래밭 만큼이나 더운 젊음의 열기, 수많은 사람들이 질러 대는 함성과 파도 소리에 시계 바늘이 정신을 잃어버린 듯 금방 시간이 흘러 버렸다.

서서히 불오기 시작하는 서늘한 바닷바람 속에서 저녁을 지어 먹은 다음 우리는 남자 애들이 쳐놓은 텐트 앞에 모여 앉았다.

저녁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가를 이것저것 얘기하는 동안에 벌써 다른 쪽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텐트 앞에 판을 벌리고 둘러 앉아 화투패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 우선 목부터 좀 축이면서.”

진용이 종이컵 가득 찰랑거리는 냉커피를 만들어 돌렸다.

“이거 서비스 끝내 주는데.”

“진용이 카페 마담해도 되겠다.”

“이야, 맛 한번 끝내 주는 걸.”

모두들 한 마디 씩 공치사를 하며 반갑게 받아 들었다.

“에, 오늘은 내려오느라 많이들 지치고 피곤할 테니까 우선 파트너들끼리 좀더 가까와지자는 의미에서 한 시간 쯤 바닷가를 거닐며 서로에 대해 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고, 그 담에 여기 다시 모여서 간단히 다과로 뒷정리를 한 후에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는 게 어때? 어차피 앞으로 사흘이나 남았는데 놀 시간은 충분하니까 말이야.”

재철이 먼저 입을 열어 의견을 밝혔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붉혀졌다. 말을 하면서 내내 재철의 시선이 내 얼굴에만 붙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한테 이야기 하고 나한테 의견을 묻는 것처럼.

“그것도 좋겠는데. 삼박사일 동안 호흡을 맞추려면 우선 파트너끼리 좀더 친해져야 할 테니까 말야.”

진용이가 찬성표를 던졌다. 식사 당번이며 설거지 당번을 파트너끼리 한 조로 번갈아 하기로 한 것을 염두에 둔 듯했습니다.

“찬성은 찬성인데 말야. 좀 아쉽지 않아? 약간 피곤하긴 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쉽게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미나가 말꼬리에 여운을 달았다.

“맞아.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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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이 미나의 말을 거들었다.

아까부터 미나를 향한 영석의 시선에 가득차 있던 선망의 빛을 눈치 채고 있던 나는 영석이 자신의 파트너인 미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강돈이 얘기를 정리했습니다.

“우선 한 시간의 개별 시간을 가진 다음에, 여기 다시 모여서 더 놀든지 자든지 결정을 하는 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절대 멀리 가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면 안 되기야.”

자신의 파트너인 강돈이와 함께 일어서면서 성숙이 내 쪽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혹시 내가 불안해 할까봐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우린 그냥 여기서 있을래. 어차피 누군가는 텐트를 지켜야 할 테니까.”

진용이가 말하자 희영이 주섬주섬 빈 종이컵들을 챙겼다.

“우린 해변이나 좀 걷지 뭐.”

재철이 나에게 권하듯 말했습니다.

“좋아.”

모래밭에는 아직도 여기저기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나는 서슴없이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조금 피곤해서일 거라고 순간적으로 생각을 하며 나는 재철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파도가 이루어 놓은 나이테를 따라 오롯이 걸었다. 하얀 파도의 포말이 불빛에 반사되어 부서지는 것을 보며 걷는 기분도 꽤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둔한 어지럼증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여러 번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잠깐만.”

나는 가만히 선 채 머리에 손을 얹고 어지럼증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왜, 어디 아파?”

재철이 다가와 내 기색을 살폈다.

“아냐, 괜찮아. 좀 현기증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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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른 손을 내리고 다시 발을 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큰 어지럼증이 기어코 나를 쭈그리고 앉게 만들고 말았다.

“심한 거 아냐? 이런 데서 아프면 자기만 고생해. 텐트로 돌아가자. 진용이한테 상비약이 있을 거야.”

재철이 손을 뻗어 나를 부축해 주었다.

“어머, 수미야. 왜 그래?”

가까스로 발걸음을 옮겨 텐트로 가자 진용이와 함께 노닥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던 희영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머리가 몹시 아픈가 봐. 진용아, 너 상비약 준비했지? 좀 찾아다 줘.”

재철이 나대신 얘기를 했습니다.

“너무 무리했나 보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희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토닥였다.

“자, 여기 있어. 두통약.”

진동이 알약 몇 개와 물컵을 건네주었다.

“약을 먹고 텐트에서 좀 누워 있으면 금방 가라앉을 거야.”

“그러지 말고 아예 방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때? 열쇠 너한테 있지?”

재철이 희영을 돌아보았다.

“열쇠는 나한테 있어. 그럴래, 수미야?”

“그게 낫겠어.”

남자애들의 텐트에서 누워 쉬기도 좀 뭣합니다 싶어 나는 차라리 방에서 편히 쉬는 게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데려다 줄게.”

희영이 숄을 챙기며 나섰다.

“미안해, 희영아. 괜히 아파 가지구 널 귀찮게 해서···”

“아냐,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한숨 푹 자고 나면 깨끗이 나을 거야.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쉬어. 이따가 올게.”

희영이 나를 데려다 주고 나가자 나는 청바지를 벗어 버리고 짧은 반바지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방 한켠에 단정하게 개켜져 있는 군용 담요 한장을 펴고 드러누웠다.

진용이가 준 약을 먹어서인지 이제 어지럼증은 많이 걷혀 있었다. 대신 무척이나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오랫동안 탄데다가 낮에 너무 갑작스레 심하게 놀아 몹시 지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서서히 깊고 무거운 잠속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련히 먼 곳에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왔다.

흐읍, 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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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꿈결이다 싶은데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두터운 밧줄에 꽁꽁 몸이 휘감긴 것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런 느낌에 나는 깊은 수면의 바닥에서 맑은 의식의 공간으로 헤엄쳐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흐릿한 의식 너머로 깜깜한 어둠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그래, 바다··· 두통··· 잠이 들었었지··· 그런데··· 친구들은··· 아직 안 온 걸까··· 왜 이렇게 꿈쩍도 할 수 없지··· 내가 정말 큰 병이 난 것일까···.

잠의 심연과 몽롱한 현실의 의식 사이를 방황하던 내 정신이 갑자기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것같은 충격에 의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나를 짓누르고 있던 가위누름의 정체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였다.

“누, 누구···”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손을 뻗치려 했지만 솜처럼 늘어진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큰일났다는 생각이 핑 현기증을 동반하고 머리를 스쳤다.

“어, 엄마.”

나는 안간힘을 쓰며 나를 결박하고 있는 남자의 사슬을 풀어 보려 했지만 웬일인지 제대로 몸에 힘이 돌지를 않았다.

“가만 있어. 이제 다 됐어.”

낯익은 목소리. 퍼뜩 재철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재, 재철이지···”

그러다가 비로소 나는 하체에 아릿하게 전해져 오는 아픔을 느꼈다. 묵지근하게 들어차 있는 이물감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따라 뻑지근하게 울려오는 아랫배의 고통···.

“아아···”

그제서야 와락 두려움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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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에 남자가 몸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몰랐다는 말인가. 허탈감이 뇌리를 덮쳤다. 눈물이 샘솟듯 흘러 내렸다. 몸은 또 왜 이렇게 힘이 하나도 없는 거지. 나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재철이에게 몸을 맡긴 채 캄캄한 나락 속으로 끝없이 추락해 떨어져 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습니다.

허억, 허억.

갑자기 재철의 숨소리가 솟구치더니 무언가 갑자기 뜨겁고 팽배한 느낌이 아래에 가득 찼다.

“후우- 정말 좋았어.”

재철이 그대로 내 몸 위에 엎드리며 뜻모를 소리를 했습니다.

“으음···”

호흡이 막힌 내가 재철의 몸을 밀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자 비로소 재철이 비켜내리며 한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흡, 흡.

비켜나려 했지만 재철의 입술은 집요하게 나를 탐했습니다. 나는 순간 크리스마스 이븟날의 일이 떠올랐다. 내 입안을 파고들던 창서의 물컹하고 비릿한 혀··· 그날은 용케 위기를 벗어났는데 정말 어이없고 허무하게 순결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절망케 했습니다.

“자···”

어둠 속에서 재철이 몸을 일으키더니 무언가를 집어 들고 내 그곳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수치심이 들어 다리를 오무렸으나 재철의 손은 이미 그곳을 지나간 후였다.

딸칵.

갑자기 재철이 일회용 라이터를 켰다. 나는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후후. 이럴 줄 알았어. 아다라시란 말이지. 이제 수미 넌 내 거야.”

라이터를 내던지고 만족스럽게 지껄이더니 재철이 곁에 드러누워 나를 안으려 들었다.

“그만 울어.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될 관문 아니야? 난 너를 벌써부터 좋아했었다구. 그래서 성숙이더러 꼭 너를 데려 오라 했고··· 파트너도 반드시 너여야만 합니다고 미리 얘길 해뒀어. 그러니 섭하게 생각 마. 내가 책임지면 될 거 아냐?”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진다는 말인가···.

나는 어처구니없이 벌어져 버린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망연히 누운 채 몸을 추스릴 생각조차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이리 와. 이제부턴 넌 누가 뭐래도 내 거야. 아무도 건드리지 못 하도록 내가 지키겠어.”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재철이 나를 안고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맞춰 왔다. 나는 거부할 의욕조차 일지 않았다. 이미 철저히 유린당해 버린 내 자신을 이제 새삼스럽게 지키고픈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절망과 체념이 나를 무기력하게 감싸고 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재철이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노와 증오를 넘어 선 자포자기적 절망감이 그저 그 순간의 나를 스스로 유기했을 뿐인 것이다.

재철이 입을 옮겨 내 젖가슴을 탐하기 시작하더니 한손으로는 아직 묵직한 통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그곳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그러더니 곧장 내 몸 위로 올라 누워서는 또다시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 헉.”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흘렸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재철이 허리를 움직였다. 입으로는 줄기차게 내 가슴이며 목덜미, 겨드랑이를 훑고 다녔다. 묵지근한 아래의 고통과는 달리 가슴이며 목덜미에서는 간지럼증 비슷한 소름이 돋아 맹렬히 솜털을 곤두세웠다. 저절로 숨이 가빠져 왔다.

“수미 넌 긴자꾸야.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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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철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한참 뒤 남편을 만난 후에야 나는 그때 재철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얼굴울 붉힌 적이 있다. 신혼 첫날 밤, 남편이 몹시 만족해서 똑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나는 남편에게 그 뜻을 물었고, 재철이 이미 어린 나이에 숱한 여자 경험이 있었던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날 밤 친구들은 민박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재철의 설명에 따르면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바로 텐트로 가기로 했습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날 나를 재철의 품에 맡기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아니, 바닷가 행을 계획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들 모의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허나 나는 이?날에도 또 그 이후에도 줄곧, 내 친구들에게 원망의 말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보란 듯이 삼박사일을 재철이와 즐겁게 보냈고(나의 명랑함에 오히려 미나들이 의아해 할 정도였다) 틈만 있으면 나를 원하는 재철의 요구에 못 이긴 척 바지를 벗기우면서도 참았다.

그때 나는 이미 여자로서의 성의 즐거움을 반쯤은 알게 되었다. 재철에게 두번 째 당하면서부터 벌써 내 몸은 남자에게 반응했던 것이다. 삼박사일 동안 재철과 가진 여남은 번의 관계에서 나는 꽤 짜릿한 쾌감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친구들과 일체의 모든 관계를 딱 끊고 말았다. 재철과도 물론이었다. 내가 바닷가에서 의도적으로 명랑하게 굴고 재철이와 어울렸던 것은, 일종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아라, 나는 그렇게 나약한 여자가 아니며, 너희들 의도대로 순결을 빼앗겼다 해서 질질 짜거나 혹은 너희들처럼 멋대로 자신을 내굴리지는 않는다. 이런 마음이 나를 강하게 지탱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에도 학교나 또 밖에서 미나들과 마주치더라도 더욱 의연해지려고 애를 썼고 공부에도 훨씬 신경을 더 기울였다. 재철이로부터 꼭좀 만나자는 연락이 여러 번 전해져 오곤 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쳐 버렸다. 수면제를 먹여 재워 놓고 탈취해 간 내 순결을 마치 내 의사에 따라 나를 소유한 것처럼 구는 재철이 가엾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바닷가에서 재철의 요구에 못 이긴 척 응했던 것은 우리를 빤히 지켜보고 있던 미나들에게 보란 듯 벌인 내 시위였음을 재철이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기까지 나는 어느 남자에게도 섣부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고교 시절 겪은 두번의 경험이 내게는 방패 역할을 톡톡히 해 준 것이었다. 물론 비싼 값을 지불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된 나는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내 과거는 내 노력에 의해 잡초 덮인 기억의 무덤 속으로 묻혀 버렸다.

가끔씩,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순결한 여자로 알고 있는 남편에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랴, 내가 사랑한 남자는 남편이 처음이고, 내가 내 의지대로 혼신의 사랑을 다해 내 몸에 받아들인 남자 역시 남편이 처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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