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검증소 뉴스]“문전으로 쇄도하라우” 효창운동장에 울려 퍼진 평안도 사투리 불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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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검증소 뉴스]“문전으로 쇄도하라우” 효창운동장에 울려 퍼진 평안도 사투리 불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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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검증소 뉴스]“문전으로 쇄도하라우” 효창운동장에 울려 퍼진 평안도 사투리 불호령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는 햇살이 비치는 본부석 주변에 2, 300명의 열성 팬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교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효창운동장 풍경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축구 지도자 가운데에는 북한 출신이 제법 있었다. 축구 팬도 마찬가지였다.

 

열성 중·장년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효창운동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효창운동장은 1960년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를 열게 된 한국이 1959년 11월 ‘국제축구경기장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효창공원 내 8,000여 평 대지에 만든 2만 석 규모의 국내 첫 천연 잔디 축구 전용 구장이다.

 

1960년 10월 12일 개장 기념 경기로 경평(京平) OB전이 열렸고 10월 14일 제2회 아시안컵이 막을 올렸다. 한국은 개최국이자 1956년 제1회 대회 우승국으로 자동 출전했고 이스라엘과 월남(남베트남), 자유중국(대만)이 지역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랐다. 한국은 월남을 5-1, 이스라엘(그때에는 아시아축구연맹에서 활동)을 3-0, 자유중국을 1-0으로 물리치고 대회 2연속 우승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6일 한국과 일본의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경기가 벌어졌다. 전반 초반 빗장뼈가 부러진 문정식이 빠진 한국은 10명이 싸워 2-1로 역전승했다. 그런데 경기에 앞서 일본의 국가 연주와 일장기 게양이 문제가 돼 국무회의까지 열렸다.

 

국제 대회 규정에 따라 국가 연주와 국기 게양이 이뤄졌지만 그때는 국민 정서가 그랬다. 이듬해인 1961년 11월 26일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칠레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 2차전이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져 한국이 1-3으로 졌다. 이 무렵이 효창운동장 전성기다.

 

몇 년 뒤 효창운동장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맨땅 구장이 됐다. 잔디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워낙 많은 경기가 열려 잔디가 견뎌 내지 못했다. 비가 오면 효창운동장은 물을 댄 논바닥 같았다.

 

어느 팀 감독은 수중전이 벌어지자 선수들 스타킹 위에 방수용 비닐 봉지를 씌웠다. 푹푹 빠지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껴 보려는 아이디어였다.

 

효창운동장은 1983년 일대 변신을 한다. 그해 6월 한국은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 20 월드컵 전신) 4강에 올랐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몇 백 면의 축구장을 만들고 구장 용지 확보가 어려우면 그린벨트 안에도 구장을 짓는다는 둥 여러 가지 축구 진흥책을 내놨지만 그해 10월 효창운동장에 인조 잔디를 깐 게 거의 유일한 가시적인 결과물이었다.

 

개장 기념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멕시코를 초청해 4개국 청소년축구대회를 열었다. 맨땅구장이나 인조 잔디 구장이나 그라운드 사정은 오십보백보지만 여전히 많은 경기가 열렸고 인조 잔디는 곧 너덜너덜해졌다. 그래서 재포설 공사를 한다고 부산을 떨기도 했다. 1960~80년대 효창운동장은 고교 축구 라이벌전이나 대학 축구 연세대-고려대전 그리고 4개국 청소년대회 같은 경기가 벌어지면 5,000~1만 명 정도의 관중이 몰렸다.

 

한국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창운동장에서 축구 열정을 쏟은 이들 가운데에는 북한 출신이 꽤 많이 있었다.

 

[먹튀검증소 뉴스]“문전으로 쇄도하라우” 효창운동장에 울려 퍼진 평안도 사투리 불호령
 

1일 오전 축구계 원로 박경호 선생에게 1950년대 중반까지 선수로 뛴, 이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한 북한 출신 축구인을 확인해 봤다. 박경호 선생 소개는 잠시 뒤에 한다.

 

한국이 태극기를 들고 처음으로 출전한 여름철 올림픽인 런던 대회 축구 대표 선수 가운데에는 GK 차순종 홍덕영 FB 민병대 FW 정국진 등이, 한국이 처음으로 나선 월드컵인 1954년 스위스 대회 멤버 가운데에는 런던 올림픽 출전 선수 외에 FB 박재승 HB 주영광 FW 이수남 최정민 박일갑 등이, 1956년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홍콩) 우승 멤버 가운데에는 스위스 월드컵 출전 선수 외에 FB 차태성 김홍복 HB 손명섭 FW 우상권 박재승 등이 북한 출신이라고 한다.

 

박경호 선생은 이 무렵 활약한 북한 출신 선수 가운데 골 결정력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린 최정민, 발재간은 우상권, 스피드는 김동근을 꼽았다. 그리고 박경호 선생은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 가는 선수 가운데 9번이나 10번을 달고 뛰는, 작은 선수가 눈에 띄던데 누구지”라고 글쓴이에게 물었다. 이승우였다.

 

박경호 선생은 1930년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946년 남쪽으로 내려와 경신중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56년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다. 최정민을 비롯해 국가 대표 팀 골키퍼 계보 2세대인 함흥철 그리고 차태성 손명섭 김지성 우상권 성낙운 등이 국가 대표 동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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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 선생에게 들은 그 무렵 한국 축구 현황을 잠시 소개한다.

 

제1회 아시안컵은 개최 협회인 홍콩 외에 아시아를 동부와 중부, 서부 등 3개 지역으로 나눠 예선을 치렀다. 1차 예선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한국은 2차 예선에서 필리핀을 2-0(마닐라), 3-0(서울)으로 제쳤다. 최종 예선에서 맞붙은 상대는 자유중국. 한국은 서울 홈경기에서 2-0으로 이겼다. 이어 타이페이에서 경기를 갖게 됐는데 원정 비용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대한축구협회 재정이 워낙 빈약해 당시 국적기인 KNA를 외상으로 타는 촌극이 벌어졌다. 요금은 예선이 끝난 뒤 자유중국과 친선경기를 치러 그 수입금으로 갚기로 했다. 2차전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을 2-1로 누르고 본선에 올랐다. 그런데 비 때문에 친선경기는 취소됐다.

 

KNA가 오기를 기다려(당시 김포~타이페이~홍콩 노선은 주 1회 운항됐다고 한다) 9월 6일, 경기 당일 새벽 가까스로 홍콩에 도착했다. 나중에 갚긴 하지만 이 비행편도 외상이었다.

 

짐을 풀고 잠시 휴식한 뒤 경기장으로 갔으니 홍콩전에 나서는 선수들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초반 연속 2골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졌는가 싶었을 때 반전이 일어났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선수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한국은 2골을 만회해 가까스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당시 홍콩은 프로 리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에서 한국을 3-2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 자유중국도 상당한 경기력을 갖고 있었다. 그때 자유중국 대표 선수들은 홍콩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본토(중화인민공화국)와는 교류가 없을 때이니 홍콩 선수들이 자유중국 유니폼을 입고 뛴 것이다.

 

어쨌든 본선 첫 경기에서 무승부는 한국이 우승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2차전에서 서부 지역 대표인 이스라엘을 2-1, 월남을 5-3으로 각각 누르고 초대 챔피언이 됐다. 1960년 제2회 대회(서울)에서도 우승한 한국은 그 뒤 반세기가 넘도록 아시안컵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일본(4회)과 사우디아라비아(3회), 이란(3회) 등은 통산 우승에서 한국을 앞질렀다. 박경호 선생은 이 대목을 가슴 아파 했다.

 

이제는 생존해 있는 북한 출신 축구인이 손에 꼽을 정도다. 박경호 선생은 평양에서 경평전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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